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서류를 정리하고 사무실 불을 끄던 날,
나는 별다른 감정 없이 그 건물을 나섰다.
30년 넘게 한 회사에서 일했고, 정년퇴직이었지만
막상 그 순간엔 무덤덤했다.

박수도 있었고, 기념패도 받았다.
하지만 어딘가 허전했다.
퇴직은 ‘인생의 한 시기’가 아니라
‘쓸모를 잃는 것’ 같은 기분이었다.
매일 아침 알람 없이 일어나게 된 첫 월요일,
나는 내 존재가 세상에서 빠진 느낌을 받았다.

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.
정리를 마친 책상 서랍에서
작은 편지봉투 하나가 나왔다.
초등학교 시절 함께 근무했던 후배가
조용히 두고 간 것이었다.

“선배님,
같은 팀에서 일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.
제가 신입이었을 때 ‘괜찮다’고 말해주신
그 한마디 때문에 다시 도전할 수 있었어요.
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.
선배님의 하루하루가
이제는 조금 더 편안하고, 더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.”

흘려 쓴 글씨였지만,
그 편지를 읽고 나서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.

나는 내가 잘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,
누군가의 기억 속에는
내가 건넨 말 한마디가 ‘버팀목’이었다니.

그 편지는 단지 감사의 표현이 아니었다.
내가 살아온 시간이 괜찮았다는 증거였다.
묵묵히 버텼고, 특별한 업적은 없었지만
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사람이었던 시간.
그걸 확인하는 데 말 한마디도, 상패도 필요 없었다.
단 한 장의 손편지면 충분했다.

나는 그날 이후로
내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.
퇴직은 끝이 아니라,
내가 쌓아온 것들이 조용히 피어나는 시작이었다.

지금도 그 편지는 내 책상 서랍 속에 있다.
어디 내보이진 않지만,
가끔 마음이 흐려질 때
나는 그 손편지를 다시 꺼내 읽는다.
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.

“괜찮은 인생이었다.”